본문 바로가기

황금가면

옛 숨결이 서린 곳 –한정리/석불 · 연당리/서낭

 

- 한정리 당산나무와 석불

 

  나무 박사 이정웅님의 삼 정자나무(三亭子木)”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느티나무를 보면서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도 아름답지만, 겨울철 무수히 뻗은 나뭇가지의 환상적인 모습이 여인의 나신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한다. 하지만 님은, 느티나무가 늦게 티를 내고 스스로 자라면서 맵시를 내기 때문에 늙은 나무일수록 더 아름답다고 했다. 그 아름답다는 삼 정자나무가 있는 한정리(원산마을)로 간다.

 

- 삼 정자 느티나무-

  들녘은 온통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장마와 태풍을 이겨낸 인고의 열매다. 마을회관이 있는 안쪽 깊숙이 들어섰다. 솟을대문이 높다란 범상치 않은 고택의 대문 앞마당에 이르렀다. 대문 안쪽의 재실같이 크게 보이는 안채는 댓돌 위의 신발로 보아 살림집 같았다. 본채에 가린 뒤편에도 큰 기와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예연서원(禮淵書院)에 배향된 망우당 곽재우(郭再憂)의 선친, 정암 곽월(郭越)의 종택과 재실(仰慕齋)이며, 불천위 사당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 500년 느티나무/정암 고택(맞은편) -

  고택 앞, 나락()이 누렇게 잘 익은 논 끝머리에 노거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람하게 서 있었다. 정암 고택과 마주한 노목의 자태를 둘러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이가 500년을 훨씬 지났음에도 건강미가 넘쳤다. 두 팔 아름으로 안아보는 둘레는 가늠키가 어려웠지만 밑동은 8m가 넘을듯했다. 그 옆에, 상수월리에서 윗면만 보았던 연자방아 숫돌도 있었다.

 

-500년 느티나무/한정리(정암 고택 맞은 편) -

 

   노거수와 대각선으로 보이는 논 가운데 황금빛을 내는 나무가 서있는 곳으로 갔다. 소를 키우는 축사 뒤편 논두렁을 내려서자, 나무 옆에 높다란 돌기둥이 보였다. 모양새가 마치 잘생긴 남근석 같아 보였다. 팽나무? 옆 돌기둥은 깨어져서 철사로 예닐곱 군데나 동여 매여져 있었다. 깨어진 돌기둥이 석불입상이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만큼 외형적으로 마모가 심했다. , , 입의 얼굴 윤곽이 그려지고, 밑쪽의 통 견 법의 주름을 보고서야 석불임을 알았다. 어찌 속인이 아니라 할지..., 당산나무 옆의 불상은 양손을 가슴으로 모으고 있는 아미타여래 불로 추정했다. (문헌상:현고現高/240), /63, 두고頭高/46, 두폭頭幅/36), 이장耳長/22)

 

-미륵불이 서 있는 당산나무 -
-남근석으로 착각산 미륵불 -
-미륵 불-

  유가초등학교 한정분교(폐교 후, 한결 직업학교 운영) 서편 삼거리 정자나무가 있는 곳으로 간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작은 숲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정자 숲을 이루고 있다. 삼 정자 느티나무다. 울타리 안의 나무는(수령 300~500, 나무 둘레 295~600) 보호수(1982.10.29. 지정)로 관리되고 있었다. 가장 큰 우측의 느티나무는, 땅 위 1m 높이에서 가지를 여섯 군데로 뻗쳐 올렸다. 나뭇잎이 쌓인 가운데가 푹 패여져 있어, 임금의 옥좌와 같은 위용 서러워 보였다.

 

-삼 정자 느티나무 옥좌 -

 

-양파를 심는 농부들 -

 

-유의태 고갯길 -

 

-가태리 들녘 -

 

  동의보감을 엮어낸 허준의 은사 유의태선생이 창녕의 성 대감(창녕성씨)을 만나러 가면서 넘었다는 유의태 고갯길로 해서 가태리(구례마을) 예연서원으로 갔다. 가태 들녘에는 트랙터가 가을걷이하고 있었다. 멀리서 울창한 동네 보호수가 보이는 길로 들어서니 커다란 제각이 서 있었다. 망우당(忘憂堂)과 존재(存齋)의 신도비 다. 그 너머 은행나무 뒤로 예연서원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예연서원-

 

  예연서원(禮淵書院)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인 충익공(忠翼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선생과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황석산성 수성장(守城將)을 제수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마친 존재(存齋) 곽준(郭峻)을 향사하기 위해, 광해군 10(1618)에 솔례 마을에 건립되었다 한다, 그 후 숙종 41(1715)에 현 위치로 이건 되었으나, 19506.25로 장판각과 전사청만 남기고 소실된 것을, 1977년 강당(景義堂)과 외삼문(崇義門)을 복원하고 사당(忠賢祠)을 부원하여 현재에 이른다고 안내되어 있다.

 

- 가태리 느티나무 -
-달창 저수지 -

 

  400년 된 은행나무가 예연서원과 함께 충의의 세월을 지키고 있었다. 경충재(景忠齋, 곽재우의 불천위 제청)는 문이 굳게 닫혀있어 돌아 나왔다. 노거수 느티나무 아래, 곽재우·곽준의 신도비(숙종 17/1691 건립, 6.25동란 파괴, 1957년 재건)가 엄청난 크기로 비각 안에 있었다. 가태리 황금 들녘을 가로질러 달창 저수지 쪽으로 내려왔다. 창녕군 성산면 연당마을을 찾아간다.

 

-본말리 고령김씨 효행비각 -
-연당(윗당마)마을/마령재 골/오른편 수복산?-

 

 

-연당암-

 

  본말리 길 옆 “ 청도김씨 정려비 ” 와 “ 고령김씨 효행비 ” 를 잠시 살펴보고 성산면사무소 쪽으로 내려가다 , 북쪽 대산리와 안심리 방면으로 올라갔다 .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넓은 들녘이 펼쳐졌다 . 연당마을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산천 건너 마을 ( 웃당마 ) 연당암이 있는 곳으로 걸어 올랐다 . 연당리 ( 행정리 : 연화 , 연당 ) 는 일찍이 불교와 깊은 연이 있는 곳이면서 또한 , 연화각시의 전설과 함께 옛날에는 신을 모신 굿 당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전해졌다 .

 

-연당암에서 내려다본 연평들/연화리(금곡)/월골마을

 

  연당리 내 서낭(연화 각시)과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 외서낭은 그사이가 좋아서 천황 대가 붙으면 떨어지지 않아, 광복 후 얼마 되지 않은 정월대보름 행사 때는 만나서 천황 대가 부러지기도 했다한다.(한국민속 대백과사전 발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마령 재 오르는 길목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연평 들판은 넉넉했다.

 

-나자랫 수녀원-
-일못의 버들나무/청도 이서면 -

 

-청도 이서면 들/일지(못) 둑 위에서-

 

  나자렛 수녀원이 있는 운봉리로 내려왔다. 1034번 지방도로인 성산로를 타고 방리 삼거리로 해서, 청도에서 창녕으로 가는 20번 국도(고암성산대로)상의 청도 비티재를 넘는다. 지난 9월 말에 찾아갔었던 금곡마을 앞으로 내려서진다. 풍각면과 이서면, 팔조령 터널을 지나 가창으로 들어선다. 옛 숨결이 서려있던,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여정을 마무리한다.

 

<여정 메모>

-언제  :2020.10.8. ()) 09:00~15:00

-어디 : 달성군 유가 읍 한정리 당산목과 석불, 가태리 예연서원.

          창녕군 성산면 연당(웃 당마)마을

-누구 : 청산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