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공 천왕 당”을 찾아갔다. 옛날 어릴 적 시골 마을에서 본 기억이 희미한 귀신이 나온다는 당집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다. 그만큼 논공 천왕 당이 시(市) 민속자료(제5호)로 지정될 만큼 귀하게 남아 있어서, 한번은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은 곳이다.
달성군은 넓은 지역만큼이나 산과 들녘이 아직도 곳곳에 많이 분포되어있다. 논공읍만 해도 달성군청이 새로 들어 선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개발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 한 곳도 있다. 다시 가 보지는 않았지만 10여 년 전 “부덕 불”을 찾아 올라갔던 갈실 마을은 어떠할까? 몹시 궁금하다.
설화·명곡 역 7번 출구 앞에서 논공 북리 행 급행 4번 버스는 차창 밖 푸른 들판을 시원스럽게 달렸다. 위천 삼거리와 상리공단 입구를 지나 논공 산업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논공 행정복지센터 논공 출장소를 중심으로 작은 도심을 이루고 있다. 성 요셉 요양병원 앞 정류장에 내려서 천왕 당 가는 길을 찾는다.
조계종 법륜사가 있는 길을 건너 우측 산비탈을 타고 올랐다. 천왕 당이 자리할 것이라고 믿고 무작정 올라선다. 굳이 안내판도 없다. 직감으로 실행하다 보니 간혹, 뱅뱅 돌다가 찾지 못하고 돌아선 경우도 있었다. 허물어진 나무계단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아마, 꼭대기 어디쯤일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 천왕당 오르는 계단 -
긴 숨과 함께 마지막 계단에 올라섰다. 저만큼 조그마한 기와집 한 칸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서늘한 냉기가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조심스레 한 발자국 두 발자국을 옮긴다. “ㄷ” 형태의 돌담에 둘러싸인 작은 당집은 장난감처럼 앙증맞아 보였다.
천왕 당은 남리와 북리 두 마을의 평온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1853년(咸豊 3)에 건립된 것을 1924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다. 문득 왜 이렇게 높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을까 싶었다. 두 동네를 굽어 살펴보려는 것이었을까? 자연석 주춧돌 위에 원기둥의 겹치마 팔작지붕이다. 손톱만 한 마루 뒤로 창살 문이 달려있다. 누군가가 들여다보았을까? 문구멍을 뚫어 놓았다. 문고리의 걸개를 빼고 문을 열었다. “당상 천왕, 마상 천왕, 보안 천왕(堂上天王, 馬上天王, 保安天王)” 위패가 안치되어 있었다.
서낭당, 당산목, 당집, 성황당은 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는 간혹 볼 수 있었다. 농경사회 삶에서의 길흉화복은 개인에게 국한되기보다 공동체 생활을 더 중시하지 않았나 싶다. 마을의 안녕을 위한 방패막이로 자연물을 의지하는 기원의 토속 신앙을 품어 않았다. 각종 개발과 미신 타파라는 미명아래 전통 풍습은 많이 사라지고 없다. 몇 해 전 밀양 퇴로마을 고택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당집을 둘러본 적이 있다.
논공 금포리 굴참나무 아래 성혈을 찾아간다. 논공 금포 시장 안 굴참나무는 길에서도 확연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밑둥치가 서너 아름은 대어 보였다. 하늘을 덮은 울창한 나뭇가지가 마을의 형성과 함께 세월을 지새우어왔음을 말하고 있었다. 예전의 당산 나무에서 쉼터로 나앉은 모양이었다. 정자에도 동네 어른보다 햇 고추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무뿌리 곁의 넓은 바위에는 성혈이 별처럼 새겨져 있었다. 간절한 기원을 빌고 빌었던 곳이 아닐까 한다.
논공 오일장은 3·8일인데, 지금은 누구도 장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을 듯했다. 금포천 옆에 자리한 옛 시장터 건물은 텅 비어 있거나 주민들의 창고 등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방앗간과 참기름 집, 돼지국밥을 파는 곳이 한두 군데 남아 있었지만, 할인마트가 시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2·7일 장이었던 고향의 오일장도 폐쇄 된지가 수십 년이 넘었다.
새터 마을 “미가 뷰” 아파트 단지 내에 산재했었던 금포리 고인돌은 찾지를 못하고 내려왔다. 수성구 상동 29번지 수성들 가운데 있었던 지석묘 일부(상석 5기)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 옮겨져 있고, 상동 80번지(구 정화여중.고등학교) 지석묘 상석 4기, 석관묘 3기, 주거지 2기는 현 “정화 우방 팔레스 아파트“ 서편 “상동 청동기 마을” 소공원에 조성되어 있다.
은화 교회가 있는 가재골(금포2리) 마을로 들어갔다. 남편의 병간호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남편의 입에 물려 생명을 연장한 열부를 위해 김해김씨 문중에서 세운 “절부 유인 충주 석씨 비(節婦 孺人忠州 石氏 碑)“와 김해인 김지(金址)를 추모하기 위해 1920년대에 후손이 지은 자암당(紫巖亭)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이엉을 덮은 오랜 흙담 벼락에서 고향의 내음을 맡을 땐 행복감을 느낀다.
초록들 넘어 하얀색에 붉은 벽돌의 논공 성당이 평온하고 아늑하게 안겨 온다.
<여정 메모>
-언제:2020.08.23.(일) 08:00~15:00
-어디:논공 천왕 당, 금포리 굴참나무, 성혈
-누구:청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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