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고산(95.3m:성동산, 성산) 자락에 있는 고산서당(孤山書堂)을 찾아 나섰다. 오래전 사월동에 산재한 고인돌(시지 2차 사월 보성아파트, 사월교회, 구천지 입구) 을 찾아 간 적이 있다. 그때 구천지 동북 편으로 보이는 독립된 나지막한 구릉지가 고산이다.
고산(성산)은 북쪽 산 언저리의 고산서당을 비롯한 동쪽 산 아래는 성동(고산 2동) 마을을 앉히고, 산 중턱(60m~80m)엔 약 2km 정도의 태뫼식 토성인 성동 산성을 쌓았다. 또한, 정상에는 봉수대를 열고 남쪽 사면에는 민무늬 토기편이 나온 성동 와요지 터가 있다. 북서쪽 기슭에는 성동 고분군 등의 삼국시대 유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마을에는 임진왜란 시, 의병장 인천인(仁川人) 채선수(蔡先修:1568~1633)를 위한 우묘소(寓墓所) 성산재(成山齊)도 있다..
“고산서당이 언제 건립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퇴계 이황(15091~1570) 선생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이 이곳에서 강론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1500년대에 이미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당은 1690년(숙종 16) 퇴계·우복 두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지은 뒤 고산서원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으며, 1734년(영조10)에 강당 및 동 서재를 새로 지었다. 그 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철거된 것을 1879년(고종 16) 옛터에 강당만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했다.”(고산서당 안내 팸플릿)
고산서당으로 올라섰다. 앞을 바라보는 전망이 시원했다. 가천역을 지나 부산(ktx)과 영천(대구선)으로 가는 기차가 자주 지나간다. 금호강 너머로 초레봉 산맥이 굽어 보인다. 퇴계(이황)와 우복(정경세)이 심었다는 노거수 느티나무 그늘이 지붕 위로 내려왔다. “퇴도 이 선생 우복 정 선생 강학 유허비“가 있는 자리엔 올봄 사당을 새로 세웠다 한다. 아직 배향은 하지 않아서 묘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오래전 사월동 고인돌 답사 시, 구천지 넘어 성동 산성을 함께 찾아 올랐지만 와요 지와 봉수 터 등은 확인을 못하고 내려왔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가을이 지나고 울창했던 나무들의 잎이 떨어지고 나면, 다시 성산으로 올라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눈이 뜨일 런지는 모르겠지만...., 가천역을 지나서 범안로에 올라선다. 노을이 유난히 곱게 물들어 간다.
<여정 메모>
-언제 : 2020.7.13. (월) 15:30~18;30
-어디 : 고산서당
-누구 : 청산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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