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황금가면

2020 봉무여정(鳳無旅程) - 동굴진지. 봉무정. 봉무토성

- 봉무동 동굴진지 -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어젯밤 제야의 종소리를 TV에서 보면서 새해를 맞았다. 은별이가 “Happy New Year”라고 전화를 했다. 휴대전화기에 까꿍 소리가 연달아 나는 아침 방송은, 산과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해맞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기원한다.

 

-무학고개에서 신천지 아파트 가는 길/청호로 -
- 아양교 다리에서 본 금호강/동구 해맞이 공원(우측) -

   몇 해 동안 용지봉(628m) 일출 산행을 다녀왔는데, 작년과 올해는 나서질 못했다. 연말에 이은 새날은 날씨가 매섭게 기성을 부렸다. 이른 점심을 먹고 봉무동 단산지를 찾았다. 문암산 자락이 봉무동 들녘으로 뻗어 내려온 끝머리에 일제 강점기 때 군사 목적으로 파 둔 동굴 진지를 보러 나섰다.

 

-봉무동 동굴진지 -
-동굴진지 안내 글 -

  불로동을 지나 단산지로 들어가다 대구국제학교 앞 회전교차로에서 이시아 폴리스 더샵 2차 아파트뒤쪽 개울을 건너면 동굴이 보인다. 겨울철이라서 산비탈의 나무가 잎이 떨어진 나목이라서 동굴은 쉽게 눈에 띄었다.

 

  봉무동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70년대 초(1970~1977)까지만 해도 수성못 아래 수성 들녘, 둔산, 부동, 신평 들녘과 봉무동 들녘이 대구의 대표 농경지로 남아 있었다. 그중 수성 들판은 좀 더 일찍 개발되었고 동촌 지역의 들녘은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해안동(법정동; 둔산, 부동, 신평, 방촌 일부)으로 통합이 되었지만, 1975년 당시 동촌 출장소로 있을 때는 산하에 11개 동이 있었다. 도심 속의 농촌 행정은 여간 까탈스럽지 않았다. 정부 시책이 쌀 증산에 역점을 두는 만큼, 묘판에 씨를 뿌릴 때부터 통일벼를 장려했다. 보리 베기, 모심기, 하곡, 추곡 수매로 농가 주민과 입씨름을 수도 없이 한다.

 

-동굴 내부 -

 

-동굴진지 내부구조도 -

  동굴 진지는 폭이 3.3m, 높이가 2.2m, 길이가 15m 정도로 자 형태로 패져 있다. 굴 앞은 쇠문을 설치하여 막아두고 온(ON), 오프(OFF) 스위치가 달려 있었다. 하나 좌물쇠가 굳게 잠겨있어 내부는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차라리 온, 오프 스위치라도 없었더라면 그런가 했으련만...

 

-봉무정.독좌암.봉무토성 가는 길 -
-봉무정 -
-햇볕이 내려앉은 담장 및 방문 -
- 벼락 맞은 봉무정 수호 목 -

 파군재 삼거리 못미처 U턴을 하여 봉무정으로 올라갔다. 조선 고종 12(1875)봉촌 최상룡선생이 행정사무를 볼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지었다 한다. 조선 시대 개인이 지은 최초의 공공기관으로 대구시 유형문화재(8)로 관리되고 있었다. 정면 다섯 칸의 맛배 지붕으로 기와 담장을 두른 고즈넉한 기풍을 보인다. 오후의 햇볕이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마루로 올라서고 있었다. 대청마루 양옆의 온돌방 격자 문살이 한층 고풍스럽다.

 

- 독좌암/왕건이 혼자 않은 바위 -

  봉무정 바로 앞 산비탈에는 독좌암이란 커다란 바위 한기가 놓여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시대인 927년 공산 동수 전투 시에 견훤의 군사 포위망에서 탈출하여 혼자 앉았다고 해서 독좌암 이라 구전되어 오는 바위다.

 

-금호강/화담마을 -

봉무정 담벼락 옆 산길을 따라 봉무토성을 찾아 올라갔다. 가랑잎이 발길을 푹푹 삐지게 했다. 사람이 찾지를 않아서인지 길은 희미하고 나뭇가지가 길섶을 가로막기도 해 어디쯤인지 찾기가 힘들었다. 봉무토성 탐방로 이정표는 무용지물이었다. 유난히 큰 무덤과 고목의 자두밭이 있는 둘레가 토성 일 것이라 짐작만 하고 내려섰다.

 

문헌상 삼국시대의 말굽형 토성으로 길이가 300m~400m 정도고, 남쪽이 금호강을 낀 단애의 절벽이라 하니 봉무정에서 쳐다보이는 구릉이 토성의 일부이다. 언젠가는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형태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질 것이다. 도심 속의 사라지는 골목과 다를 바 없다.

 

-봉무토성탐방 안내 표지판 -

 

-자두밭 둔득/봉무토성 일부? -

   새해 첫날을 맞아 해돋이는 못 갔지만, 봉무 여정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부동과 신평 들녘을 부지런히 쫓아다녔던, 오래전의 나를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는데 늦게나마 알아볼 수 있음에 고마움을 표한다.

 

  새해도 열심히 하루하루를 맞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