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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면

대구를 알자


- 태봉에 방치된 광해군 태실의 윗 덮개? -

대구를 알자! 내가 생각해도 너무 거창한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좀 더 대구를 이해하고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지는 오래였지만 진작 실천은 하지를 못했는데, 마침 연경동에 광해군의 태실이 있다기에 찾아 나섰다.

신천 동로에서 금호강을 건너 동화 천변을 따라 올라가면 태봉은 연경 마을을 내리기 직전 마지막 기를 솟구쳐 모은 자리였다. 먼 곳에서부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마을은 택지개발로 사람들이 이주를 해서 빈 집들만 흉가처럼 남아 있었다. 중장비가 흙먼지를 날리면서 멀쩡한 집들을 부수고 있는 옆 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손길도 금년 농사가 마지막 같아 보였다.

광해군은(光海君,1575~1641.재위,1608~1623) 조선 제14대 왕위에 오른 선조 임금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 시에 세자로 책봉되어 전란에 큰 공을 세워 선조 사후 왕이 되었으나 동복형 임해군, 이복 영창대군을 사사하는 등으로 인조반정에 폐위가 된 왕이다. 그의 무덤은 비(妃)인 문성군부인 유씨와 함께 경기도 땅에 묻혀있다.

광해군의 태가 어떻게 연경까지 오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산세가 수려한 영남지역이 풍수상 길지가 많은 곳인지도 모른다. 성주의 세종대왕 왕자 태실지나, 가야산의 단종태실, 은해사 인종(仁宗, 1544~1545,재12대왕) 태실, 예천 명봉산 문종(文宗,1412~1452, 제5대 왕, 재위,1350~1452) 태실이 뒷받침하고 있음이다.

태봉에 올랐으나 태실의 형태는 알 수 없고, 깨어진 밑 둘레 석(?)과 태항아리를 덮은 덮개 석(?)만이 남아 있었다. 오래전 답사를 한 이들은 명문의 글씨가 새겨진 석물도 보았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태(胎)를 묻는 풍습은 우리나라만이 가지는 독특한 문화로 보는 이들이 많다 백성은 출산 후 태를 땅속에 묻었으나, 왕실에서는 관상도감을 설치하여 전국의 길지를 찾아 봉안했다. 현대과학이 생병과학을 중시하면서 그중에서 유전자구조(DNA)를 해독하여 인간의 생로병사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 핵심이 줄기세포 연구인데, 태를 보관한 선조들의 현명함을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산자락에 세워진 안내 간판이 무색했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스산스럽게 어지러운 골목을 벗어나면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곳으로 나와 진다. 어른 양팔로 일곱(6.8m)번이나 가눌 만큼 밑 둘레가 크다. <연경동 느티나무>로 수령 1000년에 수고가 17m나 되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를 바로 아는 길은 문화재의 답사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고장은 소설가(현진건), 작곡가(박태준), 시인(이상화), 화가(이인성?), 영화감독(이규환)이라든지, 350년 전통의 약전골목, 영남 사림의 산실 <도동서원>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산재하여있고, 출중한 인물 또한 많다. 이를 바로 알고 보존하고 알림에 힘을 모으는 것도 대구를 바로 아는 보탬이 아닐까 한다.

몇일 전 달성군청에서 낙동강 <사문진 나루터>복원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근대 한국영화의 효시, 대표? 하는 <임자 없는 나룻배/이규환 감독>의 촬영지도 사문 나루 화원 유원지였던 낙동강 변이다. 그 분의 작품이(영화 필름) 타 시에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여정 메모>

- 일 시 : 2011.6.21.(화) 10:00~13:00

- 곳 : 연경동 일원

- 함 께 : 청산내외

- 멀리서 바라본 태봉 (앞흙이 페인 봉우리)-

- 태봉 안내현판 -

- 방치된 태실의 윗 덮개? -

- 택지개발로 부서진 집 -

- 마지막 농사를 짓는 농부 -

- 보호수 느티나무 -



- 동화천변의 미류나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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