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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면

그리움을 찾아 가는 길

   봄 날의 길목,  5월은 계절답게  푸르름이 가득하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에  소재한 < 웰리힐리 파크>로 간다. 가족이  이틀 간 머물 곳이다. 여정 길은 그간 인연을 맺었던 곳도 있고, 새롭게 이정표를 남겨야 할 곳도 있다. 어느쪽이던지 떠남은 그 자체가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그곳이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면 그리움은 더 깊게 서려있다.

 

  그 길목에 곤충 박물관이 있는  예천 상리면의 고항마을을 찾았다. 꽤나 오래된 해의 8둴15일 공휴일을 이용해서 기차를 타고  예천을 들렸다.  하루에 3번인가 들어가는 버스로 고항 마을에서 옥녀봉 고항치를 넘어 풍기 땅으로 걸었던 추억이 올올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춘천의 남이섬에서 많은 상춘객을 만나고,  남한강 유역 원주의 3대 폐사지-법천사지.거돈사지,흥법사지-를 둘러보면서 세월과 함께 사라진  군상들의  삶을 보기도 했다.

 

  

<여정 메모>

- 일시:2014.5.3(금)~5.5(일) 2박3일

- 곳   :횡성,원주 일원

- 함께:10명(희누네,은별네,아들&며늘,청산 내외)

 

 

 

- 단양 적성(사적 제265호)-

 

 

- 예천 용궁면 금당실 마을 -

 

조선 태조(이성계)가 도읍지로 정하려 했을 만큼 길지인 금당실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정감록(鄭鑑錄)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이다.

 

 

- 고향의 향수가 물씬 나는 정미소 -

 

 

- 예천 곤충 연구소의  나비 전시실  -

 

오래 전  8월의 폭염이 내리쬐던 날, 고항치를 걸어서 넘었다.길 옆 사과밭에  붉은 사과가 주렁 주렁 달려 있었다. 그때 비포장의  산 길이  아스팔트 길로  다듬어져  고항치를 넘어 풍기에 닿는다.

 

 

- 물레방아 -

 

 

- 신라 적성 -

 

중앙 고속도로 단양 휴게소(춘천 방면) 뒷편에 쌓아진 삼국시대( 백제땅에서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신라와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의 영토에 편입)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를 엿보게 하는 성벽 흔적이다. 휴게소 뒷편 공원을 나가서 10여분 올라서면 세월의 무게에 허물어진 성벽을 블 수 있다.

 

 

 

-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제198호) -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진흥왕6-11년(545-550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웰리힐리 파크 -

 

 

- 남이섬으로 가는 선착장에 모여든 사람, 사람 -

남이섬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붙어 있는 육지로서 홍수 때만 섬이 되었다가 1944년 청평댐이 만들어 지면서 온전한 섬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북산 강에 떠 있는 반달 같은 섬 남이섬은 넓이 약46만 평방미터, 둘레는 약 5km로 여의도 면적의 5분의 1쯤 됨니다. 행정구역상 남이섬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 주차장은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잘전리 입니다. -남이섬 남이장군 -

 

 

-섬에서 선착장으로 돌아나오는 뱃전에도 사람, 사람 -

 

 

-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사람 사람-

 

 

- 남이섬/남이 장군 묘소 -

 

조선 초기의 무신인 충무공 남이(1441∼1468) 장군의 묘소이다. 세조 3년(1457)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조 13년(1467)에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봉해진 후, 여진을 토벌하여 이등군공에 올랐으며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를 꾀한다하여 28세 때 처형당하였다. *남이장군의 실제묘는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번지/문화재 소개-

 

<전설 속의 돌무더기, 남이장군묘>

남이섬은 남이장군묘의 이름을 따서 남이섬이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전해 집니다. 섬 북쪽 언덕에 남이장군묘라고 전해오는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이 돌을 옮기거나 집으로 가져가면 액운이 낀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1965년에 섬을 매입한 수재 민병도 선생이 봉분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추모글을 짓고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남이섬 남이장군  -

 

北征 (북정)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 째쯔가 있는 음악공연 -

 

 

- 두물머리 강물에 상념을 실어본다 -

 

 

-웰리힐리의 새벽 -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

 

 

- 진공대사탑비 귀부및 이수(보물 제463호)-

 

   신라 때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염거화상탑, 진공대사부도(보물 제365호),진공대사탑비가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 진공대사탑귀부및이수(보물 제463호)만이 남아있다. /문화재 소개.

 

 

- 천연 세월의 흔적/흥법사지 축대 -